Friday, July 20, 2012
중용에 있는 문장들
퍼옴-
이건 논어, 중용에 있는 문장입니다
學而時習之면不亦說乎아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아
학이 시습지면 불역열호아 인부지이 불온이면 불력군자호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이라 하고 천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앞에 문장은 공부함의 즐거움을 말한 것이고요
뒤에 문장은 교육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문 교육과라 조금 적어 보네요 ㅋ
서양에서는 性 이라는 것은 이성만을 말함
감각 -> 이성 -> 오성
눈으로 본다 -> 나무 -> 나무라는 개념 (뭐 이정도임)
그래서 서양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이 있음. 유혹이나 감정에 치우치는 것을 하급한 것으로 규정 (ex 담배 못 끝는 거.. 나름 일리 있음)
하지만 중용에서는 애초에 그런 선한본성/악한본성에 대한 개념이 없음.
그리고 감성이라는 것이 오히려, 오성 위에 있을 수도.
도라는 것은 진짜 길과 같아서 계속 닦지 않으면 없어져 버린다. 하늘로 부터 받은 감성을 잘 닦는 것이 도 라는 뜻.
그래서 계속 갈고 닦아야 하기 때문에 ‘배우는 것’
가끔 보면 피아노 주산 한참 배워도 나중에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전혀 소용 없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계속 길이 나고 도가 되면, 자연 법칙이 되고, 미래가 예측 가능한 법칙 같은 것도 만들어지게 된다.
누가 정리를 해 뒀네
[중용_제1강] 중용, 인간의 맛 배울학 學
2011/09/06 00:17http://svadharma.blog.me/50120217425
*
도올특강 노트
[제1강]
1. 현재는 세기적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
_ 1781년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8년후에 일어난 불란서혁명의 전초가 되었으며,
_ 1807년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 과제를 고민하는 사유의 틀 마련
_ 19세기는 유럽을 중심으로한 문명의 주축을 이루었다.
_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결과적으로 '유대인의 세계화'를 초래
미국으로 유입된 다수의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20세기 미국을 주도하는 기저 세력이 되었다
_ '자유의 여신'이 상징하고 있는 현대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함으로 미국은
20세기 명실상부한 최강 국가의 역할을 실행, 팍스 아메리카나를 주도했다
2. 21세기 문명의 축은 어디로 옮겨질 것인가?
_ 서양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사유의 전환이 요구된다
_ 수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고 17억 인구에 달하는 중국을 주목해야 한다
_ 21세기는 중국의 고전철학에서 인류의 답을 찾을 수 있다
_ 그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중국문명의 모든 가치를 집약한 최고의 철학이다.
3.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 동양사상과 한자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인은 21세기 새로운 의미의 '유대인' 역할을
수행함으로 인류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에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감각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지 말고, 깊이 있는 사유로
자신과 인류의 미래를 준비할 수 이어야 한다.
* 우리 말, 우리 것, 우리 가치를 인식하고, '나' 자신의 언어와 삶, 생각으로 전 인류의 새로운
이상을 구현해 나가야 할 과제가 있다.
[출처] [중용_제1강] 중용, 인간의 맛 |작성자 녹명
[중용_제2강] 공자와 그의 손자, 자사 배울학 學
2011/09/07 00:25http://svadharma.blog.me/50120308207
*
[제2강]
1. 중용은 무엇인가?
_ 중용은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四書)라 불리는 중국의 고대 고전이다
_ 사서는 12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자(朱喜)에 의해서 정리되었다.
cf.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일부
_ 사서 이전은 불교사상이 중국의 지배적 철학이었으며,
중국에게 있어서 불교란 외부에서 유입된 서양/서방 종교였다.
_ 사서의 집대성은 불교를 대체할 수 있는 중국 고유의 정신을 자각하게 하는
철학혁명적 의미가 있다.
2. 왜 중용인가?
_ 사서는 대학으로부터 시작해 사상의 뿌리가 되는 논어를 읽고, 그 사상의 발현으로써
맹자를 읽고 난후에 끝으로 중용을 읽어야 한다.
_ 논어가 일상적 서술집이라고 한다면, 중용은 개념적이며, 철학적인 내용으로
'미묘한 뜻을 추구'하는 유교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다.
_ 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로 인정되고 있다
* 중국이 당시 불교를 외면하고 사서를 집대성함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정신에 주목했듯이
21세기 한국 또한 변혁의 시대를 맞아 지금까지 추구해온 서양중심적 가치에서
'우리 가치'로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 중용의 가치에서 그 길을 찾는 것이 이번 특강의 목적이다.
[출처] [중용_제2강] 공자와 그의 손자, 자사 |작성자 녹명
[중용_제3강] 천명天命이란 무엇인가? 배울학 學
2011/09/13 00:31http://svadharma.blog.me/50120787480
1. 天 이란 무엇인가
_ 하늘/천의 의미는 동서를 불문하고 구약적 초월적 의미로의 인격신 Personal God 이었다.
_ 인문 문명이 형성되면서 天은 초월적 인격자에서 '천지 대자연'의 보편적 理法의 의미로
인문화된다.
* 따라서, 天命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의미가 탈색된 '대자연인 天地가 나에게 명한다'는 뜻이다.
* 여기서 命이란,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과 천지간의 상호교섭 mutual prehension으로 이해해야
한다.
2. 性 이란 무엇인가
_자사는 인간의 본성本性 human nature 을 '이것이다'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_인간의 본성은 도덕적 규정의 대상이 아니다.
(본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편견이며 철학적 관념으로 한정하는 것)
_인간의 본성 '性'이란, 끊임없이 하늘과 교섭하는 과정 process 일 뿐이다.
(性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자연과 연동하는 소통의 과정)
*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본성을 규정하는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인간이 관찰자인 동시에 피관찰자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성에 대한 논의는 영원한 미궁일 수밖에 없다.
3.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령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사람의 본성이라고 한다."
[출처] [중용_제3강] 천명天命이란 무엇인가?|작성자 녹명
[중용_제4강] 칸트와 붕어빵 배울학 學
2011/09/14 00:24http://svadharma.blog.me/50120864258
1.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_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현상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철학이다
_ 철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온 선대 사상가들의 학문적 업적을 이해하는데서 시작된다
_ 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법
철학사 -> 개설서 -> 개별 사상가의 작품을 독파하는 순으로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다
_ 철학은 '어떻게 아는가'(인식)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 고전의 소양이 없는 학문은 학문의 자격이 없다.
참다운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적 전공과 무관하게 '고전'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 한국은 정신사적으로 들끓고 있다.
경제논리에 갖혀 순수학문이 빛을 발하고있지 못하기때문에 정신적 빈곤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감각적 관심을 넘어서 '학문하는 즐거움'에 눈뜰 수 있어야 한다.
서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주요저작들이 높은 수준으로 번역되어 '읽기기를' 기다리고 있다
* 세계사상가들이 인간의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 것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해설한 시리즈.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소화해낸 언어는 높이 평가할 만 하다.
* 서양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서양문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서양에 대한 이해를 서양을 극복하게 하며, 그 길에서 동양의 고전을 체화함으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작자지위성 作者之謂聖 _ 예기/악기
"창조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인이다."
예) 음악의 역사는 연주의 역사가 아니라 작곡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국은 인재가 연주에만 몰리고 작곡에는 관심이 몰리지 않는다.
"作" 어떤 분야에서건 모방, 흉내에서 멈추지 말고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
"젊은이는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지식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2. 칸트철학은 붕어빵 철학이다
_ 붕어빵은 밀가루반죽을 틀에 찍어낸 것
밀가루반죽은 '내용' content / 감각소여 sense data / 따라서 '경험적'이다
틀은 '형식' form / 오성 悟性의 범주 / 그렇기에 '선험적'이며 '초월적'이다
밀가루반죽 + 틀 = 앎
내용 + 형식 = 인식
* 인식론 epistemology
근대 서양에서 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전한 학문체계로써
앎 knowledge의 성립과정과 그 한계를 밝힌다
* 감각소여(感覺所與) sense data
우리의 감관 five sense-organs 을 통하여 주어지는 감각자료
* 오성의 범주(悟性의 範疇) Categories of Understanding
칸트의 용어. 우리 이해력의 기본이 되는 선천적 논리적 개념 구조
칸트는 우리의 앎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전통과 대륙 합리론전통을 종합하여 '근대계몽주의 철학'을 완성했다.
_ 내용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내용은 '직관'이라 부르고, 형식은 '개념 혹은 사유'라고 부른다
(순수이성비판 제2부 선험적논리학)
* 구성설 construction theory
세계는 감관에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험적 의식이 구성해내는 것이다
* 칸트 철학은 근대적 인간, 그 진정한 '주체의 탄생'이다.
오성의 범주는 인과관계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성의 범주가 구성해 놓는 세계는 인과론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감성을 이탈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실천이성의 요청 Postulation 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도덕적 기저로서 요청되는 것이며 존재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율배반/안티노미 Antinomie의 대상이다." 칸트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오성의 범주가 창조한 것이다." 칸트
3. 자사와 칸트
* <중용>의 저자 자사는 칸트와 같은 인식론적 순수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초험적 자아가 있어 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지 않으며, 인간은 인식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천지와 교섭한다. 따라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분열되지 않는다.
[출처] [중용_제4강] 칸트와 붕어빵|작성자 녹명
[중용_제5강] 이성과 감정 배울학 學
2011/09/20 01:35http://svadharma.blog.me/50121397477
Q1. 오성의 범주에 의한 인식의 보편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A2. 칸트가 말하는 '오성의 범주'는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유아론적인 개별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타당한 것'을 의미한다.
즉, 보편적 형식으로의 전제가 되는 '순수한 형식'=순수이성을 일컽는다.
cf. 유아론 (唯我論, Solipsism)
실재하는 것은 나 개인의 자아일 뿐이며 타아 他我의 인식세계도 나의 의식내용이다.
모든 주관주의의 극단적 귀결
Q2. 인식의 선험성은 또 다시 신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A2. 이 질문은 칸트의 선험적 주관에 관한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적 초월주의는 얼마든지 비판될 수 있으며, 모든 초월주의는 초월신관과 관련된다.
* 여기서 주관이라 하는 것은, 단순한 주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간주관성 (間主觀性, Intersubjectivity)_주관과 주관이 겹쳐지는 '보편적 범주'로서의
공통주관, 상호주관을 뜻한다.
* 도올의 간주관은 훗설(Edmund Husserl,1859~1938)이 말하는 간주관보다 더 포괄적이다.
간주관의 궁극적 근거는 몸(體 Mom)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의 보편성이다.
* 몸의 보편성은 형식적 보편성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인식의 현실적 준거이며, 인간의 몸속에는 천지가 들어와 있다.
[1]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
- 칸트는 이 세계를 인간의 오성의 범주가 구성한 것으로 보았으나,
자사의 사상에는 그러한 일방적 방향성이 없다.
모든 인식은 세계와 나의 교섭의 과정일 뿐이며, 인간을 선하다 악하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일방적 방향성을 부정한다.
* 중용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규정성이 없다. 그것은 선악의 가치로 규정되기 이전의
'동적인 과정 dynamic process' 이다.
- 기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는 인간을 '원죄'로 규정한다
* 원죄 Original Sin
유대민족의 특별한 인간관으로 아담의 원죄를 인간의 생득적 죄악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원죄를 지닌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 '죄인'이란 무엇인가?
서양 : 허약한 인간의 본성, 인간의 한계성을 규정하는 개념
동양 : 범죄자
* 원죄는 구원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간의 비하이다.
유대민족의 문화적 특성에서 유래한 신화적 규정이며 그것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확장할 수는
없다.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악하다.(도올)
- 순수이성은 결국 과학이성이다.
(칸트는 뉴턴의 물리학적 과학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이라고 부른 것)
* 중용의 성은 인간의 도덕성에 관한 것 / 칸트의 성은 인간이 과학적 인식에 관한 것
* 20세기는 이성이 감정에 대하여 절대적 우위를 점유하였다.
* 감성 Sensibility
직관을 행하는 인식능력으로 칸트에게 있어서 직관은 고등한 영감이 아니라 '감각자료'를
내용으로 갖는 것이다.
감성 -------- 오성 -------- 이성 -------- 감정 感情
Sinnlichkeit Verstand Vernunft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오성의 제약을 넘어서는
'자유'와 관련된다)
* 동양사상은 '감정 感情'을 이성 위에 둔다.
동양인이 말하는 감정은 칸트가 말하는 감성이나 인식의 기본 자료인 감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감정은 이성을 초월하는 고도로 복합적 판단이다.
(감정은 이상의 계산이나 자유를 포섭하는 주체적 판단이다)
* 교육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세련된 감정의 소유자를 배양하는데 있다.
이성적 훈련은 너무도 당연한 기초과정일 뿐이다. (도올)
cf. 이성 Reason
'ratio'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계산하다 to calculate'라는 뜻
이성은 결국 인간의 선천적 수리능력이다.
실은, 이성은 저급하고 기초적인 것(도올)
* 문제는, 이성을 포괄하는 감성의 세계를 性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 => 성리학
cf. 성리학 性理學
주희는 <중용> 제1장에서 주에서 "性, 卽理也"라고 했다.
性은 자연상태가 아니라 선천적 도덕법칙의 자리라고 본 것이다.
[2] 희노애비지기, 성야 喜怒哀悲之氣, 性也
"희노애비의 기야말로 성이다." 자사
- 그러나, 자사는 性을 선천적 理로 규정하지 않는다.
<중용>의 저자 자사의 논리에 의하면 성리학은 성기학 性氣學이 되어야 한다.
성은 선천적 도덕이 아니라 태어난 대로이 무규정적 기의 감정일 뿐이다.
(이황 선생도 틀렸다는 그 고문 ㅋㅋㅋㅋㅋ 이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3]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성의 감정의 세계를 따라가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라고 한다." _중용 제1장 제2구절
- 솔성 率性 : 性을 '따라간다', 性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 도 道 : 삶의 길이며 자연의 법칙. 계속 걸어가는 길
태어난 대로의 무규정적 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선택하여 만들어가는 길
the Way, the Law, the Dao/Tao
- 수도 修道 : 삶의 길을 끊임없이 닦는다는 뜻(가능성, 미래예측성, 희망)
계속 닦지않으면 길은 없어진다(지속성)
[4]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길을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교敎라고 한다." _중용 제1장 제3구절
- 불학이능 弗學而能 : 인간의 감정이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능한 것 (공자)
* 性이라는 가능성을 率 선택해서 끊임없이 道 길을 修 닦아가는 것이 敎 문명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문명을 포섭하는 중간자적 존재이다.
性/자연 ------- 道/양면의 포섭 -------- 敎/문명
Nature Dao Civilization
[5] 도야자,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나 밖에' 엄존한다는 뜻이다
이 때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당연히 나 밖에 있는 존재가 된다.
가리 可離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 道는 몸의 길이다. 몸의 길은 없으면 종료된다.
도는 나의 몸/우주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몸은 떠날 수 없다.
동양인에게 하느님은 잠시라도 나의 몸을 떠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동일한 경건성에 도달할 것이다)
[출처] [중용_제5강] 이성과 감정 |작성자 녹명
[제5강_핵심]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가치론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모든 일시적 규정성은 허구다
인간의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란 끊임없는 수도의 세계이다
수도는 결국 몸의 닦음이다
나의 몸이야말로 나의 하나님이다
[출처] [중용_제5강] 이성과 감정 |작성자 녹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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